정조대왕의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실린 홍좌나씨(鴻佐羅氏)
역사를 바로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더우기 우리나라는 왜의 역사왜곡과 지나(China)의 역사침탈에 더하여 일부 강단사학과 제야사학(혹은 향토사학)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상고사 뿐만 아니라 근현대사까지 정론이 혼탁할 지경에 처하여 있는 것이 현실 입니다.
고문서나 옛문서에 실린 글들이 확실한 논거없이 배척되는 일도 비일비재한데다 전혀 근거가 없는주장을 철저히 신봉하여 명확히 잘못 되었음이 밝혀지는데도 다른 의견을 배척하는 일도 일어납니다.
여기에 올린 이 글도 너무 허황되고 한쪽으로 간 느낌이 있으나 그렇다고 배척할 만한 확고한 근거도 없이 척결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올립니다.
홍좌나씨를 여러 문적들에서한결같이"신라가 도와"라고 하였는데, 저는 그에 대하여 어떤 근전이 있을까?
여러가지 생각을 하였으나 아직 발견한 것은 없습니다.
가령 유방의 한나라는 유씨의 나라인데 어떤 글에 홍좌한(漢)씨라고 한 글이 있을까?
가령 주원장의 명나라는 주씨의 나라인데 어떤 글에 홍좌명(明)씨라고 한 글이 있을까?
가령 왕건의 고려는 왕씨의 나라인데 어떤글에 고(高)씨 혹은 려(麗)씨라고 한 글이 있을까?
전형이나 근전을 찾지 못한데다 한문을 잘 모르니 궁금증만 더 쌓일 뿐이고 아직도어둠에 잠겨 있습니다.
행여 밝음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이 글을 올립니다.
홍좌나씨(鴻佐羅氏)
당(唐) 나라의 봉상정경(奉常正卿)이며 신라(新羅)의 흥무공(興武公)인 김유신(金庾信)의 묘소에 치제한 글
= 출처 : 홍재전서(弘齋全書) > 홍재전서 제22권 > 제문(祭文) 4 > =
아, 봉상경이여 / 猗奉常卿
크게 신라를 도왔으니 / 鴻佐羅氏
하늘을 우러르고 산에 맹세함에 / 仰天誓山
검기가 자줏빛 무지개로 나타났네. / 劒氣虹紫
크나큰 모유(謨猷)와 지략(智略)은 / 宏猷大略
유일무이한 것이었으니 / 有一無二
높고 높은 백제의 부소산(扶蘇山)에 이르고 / 頟頟扶蘇
끝없는 고구려의 패수까지 정벌했네. / 悠悠浿水
병사들이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서도 / 兵不血刃
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으니 / 許大輿志
당 태종이 가상하다 칭찬하고 / 唐宗曰嘉
상경의 지위를 주었네 / 畀上卿位
이름을 우주에 드리워 / 垂名宇宙
청사에 드러나 보이니 / 揭示靑史
성대한 공로가 있어 / 翼翼勞伐
자손에게 미쳐 이르렀네 / 施及孫子
월성의 서쪽 모퉁이에 / 月城西阿
이 무덤이 있으니 / 有此神隧
거록에 대한 생각이 / 鉅鹿之思
매양 끼니때마다 그침이 없었네. / 每飯不已
금관의 옛 시조 왕릉에 / 金官古陵
마침 제사를 드리는 일이 있는데 / 時適有事
공이 실로 그 자손이니 / 公實其胄
일체로 경건히 제사를 받드네 / 一體虔祀
나의 생폐(牲幣)와 예주(醴酒)를 흠향하고 / 歆我牲醴
우리에게 복이 번성하도록 도우소서 / 佑我繁祉
<해설>
○弘齋全書는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1752~1800)의 시문·윤음·교지 및 기타 편저를 모은 전집.
○가야사 연표 /(『삼국사기』,『삼국유사』,『신증동국여지승람』의 관련 기사에 의거
-532년 :금관국왕 김구해(金仇亥), 왕비와 노종(奴宗), 무덕(武德), 무력(武力) 등 세 왕자를 데리고 신라에 항복함으로써 멸망. 신라는 그들을 진골로 편입시키고 본국을 식읍 (食邑)으로 삼게 함.(사기, 유사)
홍좌나씨(鴻佐羅氏)
정조대왕께서 김유신 장군에게 올린 제문에 실린 홍좌나씨 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글의 문맥만을 보면 "나씨가 도와서" 혹은 "나씨를 도와서"가 아닌가요?
이를 무조건 "신라를 도와서"로 풀이하고 있으니, 그를 반론할 만한 학문적 소양은 없으면서 만족하지 못하고 앞으로 더 연구하여 봐야 하겠다는 맘을 먹고 있으나 능력이 미치지 않아안타깝습니다.
그런데 금성나씨 정묘보(丁卯譜 건융乾隆 12년 정묘 서기 1747년 영조英祖 23년)를 보면 가락국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하자 신라왕이 나씨를 사성을 하여 예우하였다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이 글을 우리나라의 나씨 내부에서 조차 있을 수 없는 글을 함부로 올렸다하여 심하게는 정묘보를 정묘무보라고 하면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여, 논쟁이 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조대왕의 "홍재전서(弘齋全書) > 홍재전서 제22권 > 제문(祭文) 4" 로 실린 위 "신라(新羅)의 흥무공(興武公)인 김유신(金庾信)의 묘소에 치제한 글"의 홍좌나씨(鴻佐羅氏)"가 정묘보에 실린 전설 같은 글을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맘만 앞설 뿐입니다.
첫째: 홍좌나씨(鴻佐羅氏)를 "나씨가 도와"로 해석하는 방법은 없을까?
삼국유사 등 고문서에 김유신 장군은위 구형왕의 삼남 김무력의 손자로 되어 있습니다. 만약 진실로 신라왕이 구형왕에게 나씨로 사성을 하였다면 김유신 장군이 나씨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홍좌나씨는 "신라를 도와"가 아니라 "라씨가 도와"일 수 있습니다.
이에더하여 가라(가락국)와 신라는 여러가지 유물들이 흉노와 스키타이계와 일치하며 아틸라의훈제국 유물이 가락에서 발견되는 등 동일성이 보이는데다,신라(새라 新羅)와 가라(加羅)의 '나(羅)'를볼 때홍좌나씨가 "신라를 도와"가 아니라 "라씨가 도와"일 개연성이그만큼 높아 집니다.
둘째: 홍좌나씨(鴻佐羅氏)를 "나씨를 도와"로 해석하는 방법은 없을까?
마침 지난해에 지나(China)의 杨万娟(양만연)교수가 가 초나라의 부용국이었던 나국(羅國)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신라를 세웠다고 하였습니다. 그 글을 여기에 붙입니다. 양교수가 지나(China)사람이어서 우리가 보기에 많은 문제점이 있으나 초나라의 부용국인 나국(羅國) 사람들이 치우천왕의 자손이라는 부분 등은 취할만 합니다.
만약, 이런 양교수의 주장이 어느 정도 객관성을 확보한다면 신라의 왕통이 나씨가 섞여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양승연 교수의 글 )그렇다면 홍좌나씨는 "나씨를 도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 한가지 우리나라 나씨의 오랜 역사가 기록에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나씨 족보인 가정보(嘉靖譜 임술壬戌 41년 서기 1562년 명종明宗 17년)에 의하면 한나라 선제 때 마한땅에 나덕헌 덕부 덕공 삼형제가 왔다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이 내용은 대한성씨총람(*)그런데 이 시기는 양교수가 주장하는 초나라 부용국 나국(羅國)사람들의 이동시기와 비슷한 시대 입니다.
* 대한성씨총람(회생사. 1955년 초간. 그동안수차 증보하였으며 2012년 증보 발행을준비하고 있음)
초나라는 바로 한나라 유방에게 망한 초패왕 항우의 초나라인데, 초나라가 망하고(BC202년) 한선제(BC91년-BC49년)까지 110년~150년의 정도이니 양교수의 주장과 어느정도 시기가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의 건국(BC57년) 시기와도 비슷하여 양교수의 주장의 헛되게만 보이지는 않습니다.
너무 한 쪽으로 간 느낌이 있긴 하지만가정보 및 정묘보와 양교수의 주장을 너무 고정된 틀에 담아 허구로만 보기에는정조대왕의 홍좌나씨(鴻佐羅氏)가 너무 생생합니다. 나씨를 무조건 "신라를 도와"라고 볼 것이냐? 아니면 "라씨가 도와"라고 볼 것이냐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한 과제라고 생각 합니다.
또 하나 발해에서 고려에 귀화한 나씨에 연구 입니다.
918년 고려가 개국하고 발해(698~926년)가 멸망하자 나씨가 귀화하여 온 것이 역사에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발해에서 온 나씨라면 고구려를 이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렇게 고려에 귀화한 발해의 나씨들이 있다는 것은 양교수의 설에 연결하여 정조대왕의 홍좌나씨(鴻佐羅氏)가 "신라를 도와"가 아닌 "라씨가 도와"가 될 개연성에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특히 마한의 나씨 삼형제, 발해에서 고려에 귀화한 나씨 등은 우리나라 역사의 깊이를 더할 수 있는 기록입니다.
.밝 누 리.
[밝은 우리의 온 삶터]
-밝은 밝음이며, 온은 따뜻함(溫)이고 모두(全 온통)이며, 누리는 살아가는 세상이고 살아가는 역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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