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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속 고구려왕국 齊제. 중국역사책에는 있지만 우리역사책에는 없는..

koreanuri@hanmail.net 2013. 5. 29. 18:33

중국속 고구려왕국 齊제. 중국역사책에는 있지만 우리역사책에는 없는..
당나라의 2/3를 차지한 고구려 유민 이정기의 제나라


고구려가 멸망하고 60년후 고구려의 유민인 이정기는 당나라 안에 齊제나라라는 나라를 세워 왕을 칭하면서 4대에 걸쳐 약 60년 동안 당나라와 대적하여 천하패권을 놓고 다투었을뿐 아니라 당나라를 멸망시키려 하였을 만큼 성세盛勢를 떨쳤다.

 

< 이정기로 부터 4대 60년 가까이 지나支那 대륙을 2/3 가까이 차지하고 당나라를 압박한 齊제나라>     

            < 제나라는 발해와 신라교역로를 장악하고 교역권을 확보하여 흥성하였음을 위 지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
                                             < 위 사진을 클릭하면 큰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

 

유민이란 나라가 망하고 흩어진 백성들을 말한다.
우리는 고구려 유민으로 고선지를 기억하고, 백제 유민으로 흑치상지를 기억한다. 그러나 그들은 당나의 장수로 살아간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정기는 다르다.
그는 齊제나라라는 나라를 세워 4대 60년 가까이 당나라와 적대시하면서 독립왕국을 이룩하였다. 그런데 우리역사서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말할 것도 없고 제왕운기 등 어디도 이런 사실이 전하지 않는다.

  ≪ 구당서 ≫의 <이정기 열전>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사실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2007년에 연세대 교수 지배선 지음 '중국소 고구려왕국 齊제"라는 책이 나왔다.
거기에 실린 ≪ 구당서 ≫의 <이정기 열전>를 옮겨 본다.

 

  "추격하는 군사들을 피해 후희일이 도망하자, 군사들은 곧 회옥(정기)을 군수軍帥로 옹립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평로ㆍ치청절도관찰사ㆍ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ㆍ검교공부상서(檢校工部尙書)ㆍ겸어사대부(兼御使大夫)ㆍ청주자사(靑州刺使)를 제수하면서, '이정기'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얼마 후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를 추가하고 요양군왕(饒陽郡王)으로 봉했다."<이상 34쪽>

"이정기에서 이사도에 이르기까지 운주ㆍ조주 등 12개 주를 60여 년 동안 사사로이 점령하였다. 민심이 자신들로부터 등을 돌릴까봐 염려한 나머지, 혹독한 법을 동원하여 백성을 다스렸다."<이상 459쪽>


이렇게 지나의 사서에 엄연한 이정기가 왜 우리역사에는 한 줄도 나오지 않을까?

위책의 설명을 인용한다.

 

"당의 제후국임을 자처했던 신라와 유교사상이 지배이념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은 조선과 같은 나라에서, 감히 당과 패권쟁탈전을 벌였던 고구려 국가 제나라에 관해 붓을 놀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략- 따라서 이정기의 역사는 어둠에 묻힐 수 밖에 없었다." ( '중국속 고구려왕국 齊제' 머리말에서 인용)

 


나는 이 책을 수 년전에 읽었다.
이 글을 읽는 분이 위 책을 사서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부지런한 사람들이 책을 읽고 카페 클럽 블로그 등에 올려 놓아 안 사 보더라도 내용의 대강은 알 수 있을 것같다.


 * 문화일보 “8 ~ 9세기 中대륙에 고구려 왕국 존재”  http://me2.do/FiGDUNYY
 * 잊혀진 왕국 ,이정기의 제나라 인터넷 검색결과  http://me2.do/FzDVM6VG

위 신문기사와 검색결과에 노출된 카페 블로그 클럽 지식인 등을 살펴 보기 바랍니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악착같이 고구려를 쳐들어 왔다.
왜일까? 간단하다. 그들이 선비족이었기 때문이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선비족이 세운 나라였기 때문에 고구려와 양립할 수 없었다.  선비족은 고구려의 백성들이었다. 그들이 지나支那로 흘러 들어가 삼국시대를 이은 위진남북조시대의 5호16국의 혼란을 수습하여 통일제국을 이룩하였다. 그렇기에 수문제나 당태종은 악착같이 고구려를 쳐들어 왔다. 고구려 백성이었던 그들로서는 큰 나라를 세운 입장에서 고구려와 양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고구려는 지배계급의 내분과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멸망한 고구려의 유민들이 당나라에서 노예로 살면서 출세할 수 있는 지름길은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정기는 자력으로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절도사가 되었고, 당나라 안에 고구려 국가를 세워 막강한 세력으로 당의 중앙 조정을 르고 독립왕국으로서 지위를 누리면서 당을 대체하여 지나를 차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당나라에서 이정기는 절도사였다.
절도사가 무엇인가? 물론 당나라의 군벌이다. 그러나 계림도독부 웅진도독부 안동도호부를 보라. 신라의 왕은 계림도독부의 절도사였을 뿐이다. 웅진도독부는 멸망한 백제땅에 안동도호부는 멸망한 고구려 땅에 설치한 당나라의 지배기관인데 여기의 수장이 절도사인 것이다. 이 것을 보면 이정기가 당나라의 군벌이라고는 하나 독립왕국의 제왕의 위치를 가졌고, 당나라를 대체하는 세력이 되려고 당나라를 압박한 이유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이정기의 제나라는 4대 55년간 지속 되었다.
제 1 대. 이정기(765~781)
제 2 대. 이납(781~792) 이정기의 아들
제 3 대. 이사고(792~806) 이납의 아들
제 4 대. 이사도(806~819) 이사고의 이복동생
여기에 이정기가 절도사에 임명되지 않았으나 실제 권력을 잡은 기간을 포함하면 거의 60년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지나支那의 산동성 전체와 하북, 하남, 안휘성 일대에 제(齊)나라를 세워 직접 통치지역이 아닌 동맹지역을 포함하면 당나라땅의 2/3를 통치하였던 것이다.


이 제나라의 후광이 어디에 미쳤을까?
장보고가 당나라에 들어가 신라방 사람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만든다음 청해진에 해상왕국을 세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비록 나라가 망하였지만 지나支那에 고구려 국가를 세워 당나라와 60년 동안 항쟁한 齊제나라를 본 장보고와 신라 사람들이 뭉쳐야 강해진다는 것을 알게되어 힘을 합쳐 해상왕국을 이룬 것이다.

 


고구려의 멸망은 참 어처구니가 없다.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연개소문을 '4천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만한 영웅'이라고 하였다. 백번 옳은 말이다. 단재의 추적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북경까지 고구려군을 진출 시켰고 수나라의 침공을 잘 막아내어 망하게 만들기도 하였으며 당태종의 침공을 물리치고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난 어려서 연개소문을 책으로 읽으면서 피가 끓어 올랐었다. 반도의 조그만 나라로 알았던 우리 민족에게 연개소문 같은 영걸이 있어 수나라와 당나라를 대적하여 오히려 수나라를 멸망하게 만들고 당태종도 죽음에 이르게 하고 멀리 북경까지 쳐들어 가는 활약을 펼치는 연개소문의 활약을 읽으면서 웅혼한 우리민족의 모습에 감탄하였었다.


그러나 난 지금은 연개소문에 대하여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연개소문의 아들들을 천남생과 천남건이라고 하는데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성이 연씨인데 삼국사기나 여러사서에 천씨(泉氏)로 기록된 은  당나라 고조의 이름이 이연(李淵)이기 때문에 기휘(忌諱)하여  연씨를 천씨로 둔갑시켰기 때문이다.

이 아들 형제가 결국 고구려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

 

호랑이 애비에 왜 그런 못난 자식들이 있었을까?
"호부(虎父)밑에 견자(犬子)없다"는 말은 잘 못 된 말인 것 같다. 지나支那 삼국지의 유비의 아들 유선이나 조조의 아들 조비를 보더라도 그렇다. 그들은 아비의 유업을 지켜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오히려 "애비만한 자식없고 형만한 아우 없다"는 말이 더 들어 맞다는 말인가?
  남생과 남건은 서로 연개소문의 뒤를 이으려고 싸우다가 못나게도 고구려를 당나라에게 멸망당하게 만들었다. 더욱 우스운 것은 고구려가 멸망할 때가 당나라 고종 때라고 하지만 그때는 측천무후가 권력을 휘두르는 시대였다는 점이다. 고구려의 멸망은 668년인데 측천무후는 656년 황태자(皇太子)였던 이충(李忠, 643~664)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장남인 이홍(李弘, 652~675)을 황태자로 앉혔고, 664년부터는 수렴청정을 통해 실질적으로 중국을 통치하였으니 고구려는 측천무후의 말발굽에 짓밟힌 것이다.


또한 원조 사대주의자로 불리는 김춘추가 당나라에 들어가 사대외교(648년 진덕여왕 2년)를 벌려 당나라를 끌어들여 삼국통일을 이룩했다지만 이도 하필 여인에게 무릎을 꿇은 형태이니 생각하면 가소로운 일이다. 여자가 통치하는 시대에 백제도 멸망하고 고구려도 멸망하였으니 측천무후가 여걸인 것은 분명하다.


측천무후는 지나支那사람이니 따질 것 없지만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대외교를 벌일 때가 측천무후 때이고, 백제와 고구려가 멸말할 때도 측천무후 때이며, 영걸인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못나게도 당나라 군의 향도 노릇까지 하면서 고구려가 멸망하게 만든 때도 측천무후 때인데 어떻게 연개소문 같은 호랑이 아비에 남생 남건 같은 매국하는 견자가 있었단 말인가?  그렇기에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연개소문의 대륙을 경영한 활약이 빛이 바래 보이는 것이다.


지나와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난민이 가장 많이 지나支那로 흘러 들어간 때가 이 시기이다. 백제 멸망시, 고구려 멸망시, 수많은 포로들을 비롯하여 당나라 조정의 정책에 의하여 유민들이 당나라로 이주한 것이다.  이 난민가운데 대조영이 발해를 세워 해동성국이라 불리며 신라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이루었으니 고구려가 발해로 이어진 것이어서 우리나라의 정통은 그대로 이어졌다.


지나支那로 간 고구려 및 백제의 유민들은 어찌 되었을까?
고선지나 흑치상지 같이 당나라의 장수가 되었으나 큰 공을 세우고도 당의 조정으로 부터 죽음을 당한 장수들이 있지만 대부분 노예나 하층민으로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후예 가운데 이정기(李正己, 732~781)가 있다.
  지배계층의 분열과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고구려의 유민은 발해를 세워 북방의 성세盛勢를 이어가면서 또 한 편으로는 당나라 안에 제나라라는 나라를 세워 당을 압박하고 60년 동안이나 독립왕국을 유지하였으니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당나라 사서史書를 줄줄이 외우는 신라. 고려. 조선의 선비들이 한 줄도 역사서나 하다 못하면 그들의 문집에 조차 남기지 않았으니 안타깝다 못하여 애닯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21세기는 배달겨레 웅비雄飛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국사 교육이 절멸 상태라고 한다. 대학 입시에서 선택과목으로 국사를 선택하는 비율이 불과 7.5%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난 환단고기를 정독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여기 저기서 얻어 읽은 내용만으로도 평소 내가 아는 지식과 합쳐 환단고기와 비슷한 정도의 역사관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지나支那와 왜倭는 역사를 왜곡하면서 날을 세우는데 우리는 민족을 말하면 '국뽕'이라느니 '환빠' 혹은 '환독'이라느니 하는 사람들이 있어 참으로 안타깝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평로 · 치청 절도사 이정기의 제나라 역사는 결코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알지 못하면 스스로를 도울 수 없고 따라서 하늘의 도움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정기의 齊제왕국을 우리민족이 활동한 역사로 인정하자는 의논이 아직 미풍이지만 태풍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역사를 바로 찾고, 바로 알고, 바로 지키는 것이 우리겨레의 웅비雄飛에 크나큰 힘이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하겠다.


 

 



 

 


 

 


.밝 누 리.

[밝은 우리의 온 삶터]

-밝은 밝음이며, 온은 따뜻함(溫)이고 모두(全 온통)이며, 누리는 살아가는 세상이고 살아가는 역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