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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와 가지를 구별하지 못한 어린시절.. 지나간 것은 그리워 지느니라...

koreanuri@hanmail.net 2013. 6. 10. 15:15

바나나와 가지를 구별하지 못한 어린시절.. 지나간 것은 그리워 지느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세월이 흐르면서 달라져 가는 모습을 기억하는 것을 아름답다고 해야할까? 추억, 많은 추억이 우리 곁을
맴돈다. 추억이란 말은 우리의 삶을 풍서하게 하고 아름답게 한다. 푸시킨의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고 그리고 지나간 것은 그리워 지느니라"가 우리의 생활에 그대로 나타난다. 지나간 그리운 모습을 오늘도 이렇게 글로나마 추억속에 불러들여 본다.

 

 

  여기서 몇 차례 나의 어린시절이야기를 하였다.
거기엔 세 살, 네 살, 다섯 살의 기억들이 이어졌다. 오늘은 내가 홍역을 앓을 때의 일이 생각나서 써 볼까 한다.  국민학교 2학년, 1962년, 난 홍역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앓아 웠다. 어머니는 날 집에 눕혀두고 일하러 가셨다.


끙끙앓고 누워 있었지만 지루하다. 일어나 엄마를 찾아 나섰다. 어머니는 6촌 형님댁에 바나나를 고르는 일을 하러 가셨다. 물론 나는 바나나를 그 때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어머니가 일하러 가셨다는 것만을 알뿐 바나나를 고르는 일을 하시러 간 것은 알리가 없다. 6촌 형님이 바나나를 수입하여 마을 아주머니를 모아 고르는 작업을 하는데 어머니도 가신 것이다. 나는 일하는 마당이 보이는 언덕길에 올라 앉아 어머니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 봄과 여름이 갈리는 지금쯤이었던 것 같다.


  구경하고 있는 내게 어머니가 오시더니 먹으라면서 가지를 주신다.
엇! 그런데, 가지가 노랗다? 이 게 웬일인가? 왜 가지가 노랗단 말인가? 가지는 껍질을 벗기지 않고 먹는다. 그 시절에는 가지를 따면 씻어 먹지 않았다. 그냥 질근질근 깨물어 먹어도 아무 탈이 없는 시절이었다. 그러니 그 노란 가지를 먹겠다고 깨물었다. 껍질을 벗기지 않고 바나나를 가지인줄 알고 깨물었으니 먹을 수 있을리가 없다. 이상하게 질기고 억지로 끊어 내어 깨물었지만 홍역을 앓고 있어선지 아무 맛도 없다.


그래서 옆에 함께 있는 다른 아이들에게 가지를 줘 버렸다.
내가 먹지 못한 노란 가지가 바나나라른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여년은 흐른 후였을 것이다. 아니 5~6년 후 그러니까 중학교(1967년 중1) 다닐 때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6촌형님.
지금이니까 그렇지 그 때는 날 이뻐하는 형님이었지 6초인지 4촌인지 그런 것을 알 턱이 없는 나이였지만 그 때 그, 형님은 어린시절 듣기로 이상한 재주가 있었다. 감나무를 척 보면 몇 접이나 달렸는지, 거기서 얼마 정도의 소득을 올릴 수 있는지 알아내는 재주였다. 그래서 밑천이 없어도 장사꾼들이 동업자로 끼워 주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폐병을 앓다가 병원에서 수술하면 살 수 있다는 데도 마다하고 굿만하다가 결국 굿마당에서 돌아가셨다. 물론 굿판을 벌리던 무수리는 굿판에서 사람이 죽었으니 도망가기에 바빴고, 이런 모습이 당시 우리의 사는 모습이었다.


어느 집안에 곡절이 없겠는가?
그 6촌 형님의 어머니이신 5촌 당숙모는 내가 당숙모라고 부르면 대답을 안하시고 돌아 앉으셨다. 큰어머니라고 해야 했다. 왜? 깊은 사연이 있다.

 우리 할아버지는 구한말(조선 철종 고종 순종 연간)에 훈련원 좌첨정이란 벼슬을 하셨는데 경술국치(1910.08.29 倭의 대한제국 강제병탄)이후에 하향하여 은거하면서는 참봉(족보에 후릉참봉厚陵參奉)으로 불리셨다고 한다.

  1928년에 돌아 가셨는데 나이 쉰이 넘도록 딸은 여럿을 두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친동생의 아들(바나나를 수입하여 장사한 6촌형님의 아버지. 나로선 5촌 당숙)를 양자로 들이셨다. 그리고 장가를 들이셨다. 지실정씨 당숙모(위에 말한 6촌 형님의 어머니. 나로선 5촌 당숙모)를 며느리로 맞으셨다. 그러나 그 이후에 아버님 형제간을 두셨고 파양하게 되었다.

   이 파양을 당숙모는 인정하지 않으셨다. 시집올 때 참봉댁으로 와서 참봉어른을 시아버지로 모셨는데 파양이라니, 절대 인정할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결국 그 고집을 꺾지 않고1960년대에 이르러 어린 내가 큰어머니라고 불러야 겨우 대답을 하시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의 제사 조차 두 집에서 지낼 지경이었다. 우리집에서는 당연히 제사를 모시는 것이고, 당숙모는 당신이 큰며느리라고 주장하면서 제사를 모셨던 것이다.

  이제 어른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이런 이야기는 옛이야기가 아니라 아예 황혼연설 정도로 치부 되는데 이 부분은 나중에 따로 글로 작성할 것이다.

 


  어린시절
이 때쯤이면 삐비 뽑아먹고, 칡 캐먹고, 살구 따 먹고, 오디 따먹고, 풋복숭아 따먹고, 하지감자 캐어 보릿짚에 구워먹고, 파란 보리이삭을 잘라 보릿대에 끄슬려 손끄스름(덜 익은 파란 보리이삭을 불에 끄슬려 그 알갱이 보리알을 먹을 때 이렇게 말함)을 내어 먹고, 산과 들에 온갖 먹을 것들이 있었다.

 


그제(2013.06.08 토요일)는 오디로 배를 채웠다가 6살 아이가 배탈이 났다.
밭 가꾸기가 힘들어 소나무를 심었는데 잡초를 제거하러 가 보니 오디가 익어 있었다. 아이는 지난해 따 먹은 기억이 남아 빨리 따 달라고 성화다. 목마를 태워 뽕나무 가지를 잡아 당겨 오디를 따 먹도록 하였다. 조그만 바구니에 가득 따서 제법 많이 먹었는데 이렇게 먹은 오디에 농약이 묻어 있었던 모양이다. 

옆에 복숭아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의 주인이 오더니 농약을 쳤다고 오디를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미 먹은 오디를 어쩌겠는가? 결국 배탈이 난 것이다. 그래도 나의 아이가 이만큼 추억을 쌓아가고 있으니 배탈이 났다해도 아주 나쁜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옛 시절? 옛시절일 것도 없다.
우리가 살던 시절의 우리 모습이 이렇게 남고 쌓이고 추억이 되어 그리워진다. 이 모든 것들을 다 안고 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억지로 지울 것도 없다. 추억을 간직하면서 지킬 수 있는 것만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싶다.



 

 

 

 




.밝 누 리.

[밝은 우리의 온 삶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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