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태.. 밥처럼 먹었던 명태가...
|
첫째: 왜정 때 일부 우리나라 사람들은 명태를 밥처럼 식량으로 하였다.
둘째: 시골 마을에는 투전이 성행하였다.
셋째: 여관에서 난방비를 절약하기 위하여 아궁이에 촛불을 켜 두고 사람을 속였다.
위와 같은 내용들은 구구히 입과 입으로 흘러 다니지만 지금 젊은이 어린이들은 거의 모르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여기에 이런 하릴없는 말이라도 써 두는 것이 뜻이 없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러시아와 어업쿼타 협상이 결렬 되었다고 합니다.
엉뚱한 베트남의 불법조업 게가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것을 막는 문제 때문에 러시아측이 "대한민국에 대한 내년도 어업 쿼터 할당은 없다"고 못박았다고 합니다.
첫째: 왜정 때 일부 우리나라 사람들은 명태를 밥처럼 식량으로 하였다.
둘째: 시골 마을에는 투전이 성행하였다.
명태, 왜정시대 명태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나의 큰아버지께서 왜정(일제가 아니고) 때 강원도 주문진에 계실 때의 이야기 입니다. 1909년 생이신 큰아버지가 왜정 때였으니 1945년 기준으로 37살이 되므로 30살 때 쯤의 이야기라고 치면 1938년 쯤의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또 한 분의 큰아버지(仲伯父)께서 왜 정 때 주문진의 형님댁을 가셨다고 합니다.
1917년 생이니 1938년이면 22살 때 쯤이라고 생각 됩니다. 강릉에서 배를 타고 주문진을 가셨다고 합니다. 요즘이야 20분 정도면 강릉시내에서 주문진에 이르는 해안도로, 국도, 고속도 등이 있지만 당시에는 뱃길이 가장 좋은 길이었던 모양 입니다.
주문진 큰 집에 당도 하였는데 아뿔사 하룻밤 자고 나니 폭설이 내렸다고 합니다.
식량을 저장하여 두고 살지 못하는 처지에 눈이 와서 길이 막혔으니 밥지을 쌀이나 보리를 구할 길이 없었는데 광에 잔득 쌓아 놓은 명태를 삶아서 쌀톨이나 보리톨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명태국을 내 놓더라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동생을 데리고 막힌 눈길을 억지로 뚫고 동네의 투전판에를 가서 하루를 보냈다고 합니다. 돈을 조금 따서 돌아와 또 명태로 먹고 지내고, 이러기를 며칠을 하고나니 동생은 밥 생각에 다른 생각은 하나도 나지 않는데, 형님은 태연하게 일상을 되풀이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당시 주문진 일대에서는 눈이와서 길이 막히면 명태를 먹고 사는 집이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이야기 입니다. 명태를 식량으로 하고, 겨울이면 투전판을 벌리고...
큰아버지는 주문진 생활과 관련하여 내게 이런 말을 남기셨습니다.
주문진으로 이사간 첫 해 겨울을 어느 산골에서 지냈는데 투전으로 가족을 부양했다고 합니다. 날마다 투전판에 가서 하루 먹을 식량을 마련할 만큼만 돈을 땃는데,
"남자란 무엇이고 지탄 받을 일이 아니고 패가망신할 만큼이 아니면 배워 두는 게 좋다."
고 하셨습니다.
큰아버지는 12살에 장가 드신 후 14살에 큰아들을 16살에 딸을 낳았고, 어쩔 수 없어서였다지만 18살에 동생들과 어머니들(어머니가 여러분 계셨으므로)을 팽개치고 당신의 가솔만 이끌고 청주로 도피하였다가 주문진으로 옮겨가신 무책임한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만, 새결둘만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합니다.
큰아버지가 내게 남기신 말씀.
하나: "평생 고개를 한 번만 숙여라"
상대방의 지위고하나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내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배워라.
그래야 다시 고개 숙이지 않고 살 수 있다.
둘 : "남자란 무엇이고 지탄 받을 일이 아니고 패가망신할 만큼이 아니면 배워
두는 게 좋다."
투전을 언제 배우셨는지 천리타향 주문진에서 한 해 겨울을 투전으로 가족을 부양한
경험을 말씀하시면서 배울 수 있으면 무엇이고 익혀 두는 것이 좋다는 말씀 입니다.
셋째: 여관에서 난방비를 절약하기 위하여 아궁이에 촛불을 켜 두고 사람을 속였다.
중백부님이 강릉의 여관에서 묵은 이야기 입니다.
저녁에 추운데, 아궁이에 분명 불은 지펴져 있는데, 아무래도 방에 온기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상해서 아궁이를 들여다 보니 안에 촛불을 켜 놓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분명 불은 타고 있는데 방이 따뜻해 지지 않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가 중백부님 말고 다른분에게서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설마 중백부님이 강릉의 여관에서 겪지 않고 어디서 얻어 들은 이야기를 내게 그럴듯하게 하신 것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여겨 집니다.
지금 명태가 귀물이 되고, 러시아 로스케들이 쿼타를 주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밝 누 리.
[밝은 우리의 온 삶터]
-밝은 밝음이며, 온은 따뜻함(溫)이고 모두(全 온통)이며, 누리는 살아가는 세상이고 살아가는 역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