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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나씨는 바다와...(2) 나유 회원대장군의 해상활동

koreanuri@hanmail.net 2012. 5. 1. 17:18

우리 금성나씨의 선조가운데 나대용 나치용 두분 말고도 바다와 관련있는 분이 계십니다.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 나유(羅裕) 선조가 바로 그 분 입니다. 나유 대장군은 삼별초 토벌시에도 바다에서 싸웠을 뿐 아니라 여몽연합군이 왜(倭)를 정벌할 때도 전선을 건조하는데 참여하였고 제1차와 2차 에 출전하였습니다.

아쉽게도 여몽 연합군의 1, 2차 왜(倭) 정벌(1274년, 1281년)은 태풍을 만나 실패하였습니다.

왜인들은 이 태풍을 신풍(神風 가미가제)이라고 하여 대동아 전쟁 때는 가미가제특공대를 운영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고려의 조선술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했다고 합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1492년)보다 200여년 앞서는 시점인데도 여몽연합군의 몽고 선단은 태풍에 거의 침몰하였지만 고려 선단은 대부분 무사하였다고 원사(元史)에 기록되었을 만큼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안전하고 튼튼하고 사람이나 물건을 많이 실을 수 있는배를 만드는나라가 고려였습니다.

그 고려의 전함을 건조하는데 우리 금성나씨의 선조 나유 대장군이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1,2차 왜 정벌에도 참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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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년 정월에 일본정벌을 위해 전함 300척을 건조할 때, 전라도 담당 부부사(部夫使)가 되어 공장(工匠)과 인부 3,500여 명을 징집하는데 힘썼으며 그 해 10월 제1차 일본정벌 때 도독사(都督使) 김방경과 함께 원나라의 도원수 홀돈(忽敦) 휘하에서 지병마사(知兵馬使)로 종군하였다.
그 뒤, 제2차 일본정벌을 위하여 합포(合浦)에 3번이나 출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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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대용 장군이 거북선을 건조한 것도 나치용 장군이 조선해군의 돌격장이 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라', 이 말은 순우리말 '물'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인천에 열리는 뱃길 이름이 '아라뱃길'이라고 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신라는 서라 새라(새로운 강) 라고도 불리웠습니다.
'라라'가 '나라(國)'가 되었다고 하며, "펴라"는 낙랑 혹은 평양이 되는데 우리말 원래의 뜻은 평지의 강이라고 합니다. 우리 금성나씨가 5천년 전 고조선이나 1만년전 환국에 뿌리가 있다면 "라(羅)"가 한자어에 뜻이 있는 게 아니라 순우리말 '물'에서 기원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장보고 이후 바다세력의 으뜸은 누구였을까요?
작제건(*)도 바다세력의 하나였고 장보고(**)가 없어진신라말의 바다세력 가운데 으뜸가는 세력의 하나였습니다. 결국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것은 바다세력이 나라를 세웠다는 의미이고 우리 금성나씨의 1세조 총례공이 바다세력가운데 하나였기에 고려개국 삼한공신이 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그리고 그 후손인 나유 나대용 나치용 장군이 바다에서 용맹을 떨친 것도 다 그런 이유 일 수도 있습니다.
(* 작제건은 왕건 태조의 조부 ** 장보고는 945년에 암살당함)

참고로 나유 대장군의 일대기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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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유[ 羅裕 ]

?∼1292(충렬왕 18). 고려 후기의 무신. 본관은 금성(錦城). 삼한공신대광(三韓功臣大匡) 총례(聰禮)의 10세손이며, 형부상서 득황(得璜)의 아들이다.
음보(蔭補)로 경선점녹사(慶仙店錄事)가 되었고, 1269년(원종 10) 4월에 세자 심(諶:뒤의 충렬왕)을 시종하여 원나라에 입조하였다.

그 해 7월 세자가 원나라로부터 돌아와 파사부(波娑府)에 이르렀을 때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하고 세자의 입국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세자가 국경에 들어가는 것을 만류하였다. 이러한 사감으로 임연이 나유의 장인인 조문주(趙文柱)를 죽이고 나유를 협박해 이혼하게 했으나 의리를 들어 거절하였다.

1271년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을 따라 진도에서 삼별초(三別抄)를 치는데 공을 세웠다. 1272년에도 전라도의 삼별초를 치는데 군사 1,550명을 모집해 동원하기도 하였다.

1274년 정월에 일본정벌을 위해 전함 300척을 건조할 때, 전라도 담당 부부사(部夫使)가 되어 공장(工匠)과 인부 3,500여 명을 징집하는데 힘썼으며, 경과를 보고하는 사신이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그 해 10월 제1차 일본정벌 때 도독사(都督使) 김방경과 함께 원나라의 도원수 홀돈(忽敦) 휘하에서 지병마사(知兵馬使)로 종군하였다.

돌아와 응양군대호군(鷹揚軍大護軍)이 되었으며, 그 군공으로 원나라로부터 금패(金牌)와 무덕장군관고려군천호(武德將軍管高麗軍千戶)를 받았다. 그 뒤, 제2차 일본정벌을 위하여 합포(合浦)에 3번이나 출진하였다. 이 때 예법에 밝다 하여 개경에 소환되어 팔관회(八關會)의 의식을 맡기도 하였다.

1282년(충렬왕 8) 5월에 2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1286년 8월에 지신사(知申事), 이듬해 6월에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12월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1287년 6월에 내안(乃顔)의 친정(親征)을 청해 호두패(虎頭牌)를 받고 중익부만호(中翼副萬戶)에 임명, 이듬해 5월 만호동지밀직사사(萬戶同知密直司事)로 왕의 선두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에 참여하였다.

돌아와 1등공신이 되고, 녹권(錄券), 전(田) 100결, 노비 20명, 명위장군(明威將軍)의 호를 받았으며, 원나라로부터 쌍주금패(雙珠金牌)를 받았다.

1289년 3월에 충청도도순문사(忠淸道都巡問使)가 되어 군량을 독려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 동계방수군(東界防戍軍)을 사열하였다. 1290년 5월에 합단(哈丹)이 국경을 침입할 때 통천지계(通川地界)에 진을 치고 그를 막았으며, 평양과 연기(燕岐)에서 합단을 크게 무너뜨렸다. 이듬해 6월 교주도(交州道)에 파견되어 합단의 잔병을 토벌하였다.

1291년 11월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원나라에 정조사(正朝使)로 갔다. 이 때 원나라로부터 삼주호부(三珠虎符)·옥대(玉帶)·은정(銀錠)·궁시(弓矢)·검(劍)·안마(鞍馬) 등을 받고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의 호를 받아 이듬해 돌아왔다.

예의에 밝고 옥사(獄事)의 판결에도 능하였다. 또한 용맹이 있어 전쟁에 임해서도 두려워하지 않아 변방에서 자주 공을 세웠다.

≪참고문헌≫ 高麗史
≪참고문헌≫ 高麗史節要
≪참고문헌≫ 新增東國輿地勝覽
≪참고문헌≫ 高麗時代史(金庠基, 東國文化社,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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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7대 불가사의"라는 책은 당시 고려가 세계 최고의 조선술을 가진 나라였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안내 파일을 붙입니다.

첨부파일고려의 조선술은 당시 세계제일이었다.jpg첨부이미지 미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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