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비곡직없는 양비론과 흑백논리 그리고 비겁한 조상의 후손들? |
<단군신화: 마늘을 먹고 사람으로 화한 곰과 실패한 호랑이>
우리 사회는 예로 부터 시비곡직을 분명히 하는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근세에 들어 매국노들의 발호와 왜의 침탈에 이은 서구사조의 침투와 동족상잔의 참극에 의한 피해를 겪으면서 시비곡직을 가리기 보다 양비론을 처세술로 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시비곡직을 시시비비와 혼돈하는 분위기도 만연하여 있습니다.
괜히 시비를 거는 것과 시비곡직을 가리는 것을 구별하지 않고 왜 참견하느냐는 투로 덤비는 일이 잦아지면서 더욱 양비론이 본래 우리 민족의 원류인양 인식되도 있습니다.
설혹 시비를 건다거나 흑백논리에 빠져 매사를 네편 내편으로 편가름 한다는 말을 듣는다 하더라도 옳은 일이면 시비곡직을 분명히 하는 게 앞으로 우리나라가 발전하여 나가는 길임을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나는 남의 싸움을 맡아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모른체하고 지나가면 그만인 것을 싸우는 쌍방의 이야기를 듣다가 어느 한편이 억지 주장을 하면 대신 싸움니다. 이런 성격 때문에 손해보는 일이 많아도 이 성격이 굽혀 지지 않습니다. 나는 물론이고 남이라해도 잘못하는 것을 보면 시비곡직을 가리지 않으면 않됩니다.
이런 정도는 지나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가 자잘못을 분명히 하지 않고 우물쭈물 양비론으로 처세를 펼펴가는 것은 문제가 있어도 큰 문제가 있습니다. 결국은 이러니 어른이 없어지고, 존장이 소용없이 되고, 소송이 늘어나고, 모든 것을 법에 호소하게 됩니다.
법이 무엇입니까? 결국은 시비곡직을 가리는 것 아닙니까? 1심 2심 3심을 거치면서 시비곡직을 가리는 것이 법이요, 재판이요, 법관이니 결국은 시비곡직을 가리는 것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때 양비론을 처세의 근간으로 삼는 것은 비겁합니다.
확실하게 자기 의견을 밝혀 옳바른 여론을 형성하고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여야 합니다.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양비론과 흑백논리는 있게 마련 입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보신을 위해 양비론을 내세우는 분위기가 만연되어 있고 그 현상이 더욱 확대 되고 있습니다.
그런 양비론이 근절 되어야 우리나라가 더 발전할 수 있습니다.
명확한 자기입장과 의견을 개진해야 여론이 옳바로 형성되고 바른길로 진행할 동력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양비론화 흑백논리 둘 모두 필요하기도 하고 적절하게 활용하여 삶을 윤택하게 하여야 함은 물론 입니다.
하지만 자기 일신의 보신을 위해 사용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우기 양비론이 기승을 부리면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렵고 다수 의견이 진정 무엇인지 알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더우기 사회지도층이나 지식인들이 그런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oblesse oblige)는 양비론에도 통하는 것입니다.
지식충이 바른 여론을 형성하고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여여할 책임이 더 무겁습니다.
비겁한 조상의 후손.
우리겨레를 비겁한 조상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단군신화'부터 비겁하다는 것입니다. 이후 이어지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또는 '서동요' 등 전승되어 오는 이야기들이 한결같이 비겁하고 그러니 비겁한 조상의 후손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보신과 안위만을 생각하는 행위 즉 양비론은 그 후손으로서 어쩔 수 없다는 자기비하인 것입니다.
시비곡직을 가려 확실하게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것이 우리 겨레의 본질인데 우리의 조상이 비겁하다니요? 우리는 절대 비겁하지도 않고 비겁한 조상의 후손도 아닙니다.
아랫글은 1993년 12월 20일 '곰방대와 크레파스'에 성교육을 게재하는 것이 옳으냐는 논란이 일자 두리뭉수리 입다물고 눈치만 보지말고 자기의 입장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는 내용을 정리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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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일 가운데는 모순이 있기 마련이므로 흑백논리가 위험 하다 하여 황희 정승이 하녀들의 다툼을 모두 옳다하고 하찮은 다툼에 옳고 그름을 모두 가름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논리를 내세워 양비론적인 귀결을 짓는것처럼 양비 론과 무사안일 주의가 최상의 보신책인양 시비를 분명히 가르지 않는 일이 현대인의 처세술의 최선책으로 인식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우리 배달 겨레의 조상은 비겁하다고 하였다. 우리의 건국 신화를 보면 곰과 호랑이가 굴속에 들어가 마늘을 먹는것으로 인 간이 되기위한 싸움을하여 인내심 강한 곰이 이긴것으로 되어있다. 이것이 아무리 신화라 하지만 있을법한 이야기인가? 마땅히 곰과 호랑이가 격렬하게 싸워 이긴자를 승자로 하였어야 하지않을까? 비겁한 조상들이라서 신화까지도 비겁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 이야기도 자기의 애인이 조국을 배반하도 록 만들어 낙랑공주를 쫓겨나게 만들어 결혼을 하였다는 것이고 이를 우리는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하는데 이것도 비겁한 호동왕자를 어이해서 비난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백제 무왕이라고 알려지는 서동은 신라국의 선화공주와의 사랑을 이루기위해 "서동요"라는 노래를 지어 경주의 아이들에게 부르게하고 신라왕은 딸의 부 정함에 화를 내어 딸을 쫓아내게 되고 서동은 이를 맞아 사랑을 이룬다는 것 인데 이것도 사랑하는 여인을 부정한여인으로 만들어버린 행위의 비겁함을 말 하는이는 없고 서동의 꾀가 신묘하다고 칭찬 하기에 여념이 없다.
신라시대 어느 거지는 구걸한 밥을 어머니에게 드렸는데 이 밥을 얻어먹은 자식을 죽인다. 신라임금은 그에게 큰상을 내려효심을 표창한다. 구걸질을 좀더해서 어머니도 드리고 자식도 줄일이지 자식을 죽인 살인자를 효자라하여 크게 칭찬하고 그것을 미담으로 전수하고 있다.
목 조목 설파한 말은 여기에서 논외로 하겠다.
현대 사회를 살고있는 우리는 항시 확실한 의사 표시를 하여 모든일의 시비를 분명하게 가를수 있어야 할것이다. 물론 흑백논리에 빠질 위험도 있지만 이도 옳고 저도 옳다는 또는 이도 그르고 저도 그르다는 양비론으로는 토론 사회가 정착 될수없고 목청이 큰사람의 말만 크게 들리고 말것이기 때문이다 친공 반공 하던 시절처럼 흑백논리에만 빠져 오직 내편 네편의 편가르기만 한 다면 이는 파당 싸움에 불과할터이지만 토론의 과정에 확실한 의사표시를 함 으로써 양비론의 폐해에서 벗어나야하며 결론이나면 이를 모두 따라서 흑백 논리의 폐해도 벗어나야 한다.
나는 "곰.크"에서 성교육을 실시 하는것을 분명히 반대한다. 성에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문제가 많기에 점차 정규 교육과정이나 아이를 가진 부모들이 성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참여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직도 그 성과는 미미한 수준이고 앞으로 교육방법을 개선하여 나가 야 할것이라는데에 이견은 없을 것이다.
"곰.크"는 할아버지와 손자가 그리고 아저씨와 소녀가 모여서 정담을 주고받 는 곳이다. 내가 그런말을 할만큼 나이들지 않았으나 만약 내가아는 아이와 정담을 나누 는 자리에서 아무 스스럼없이 성에관한 이야기를 할수있을 것인가? 할아버지와 손자 손녀가 당장에 그 상담이 필요한 상황이 아닌데 그냥 정담을 나누는자리에서 하필 성에대한 이야기를 할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그 필요성이 크다하나 일부러 그 이야기를 하여야 할것인가?
삶의 지혜와 아이의 슬기를 서로 살피는 자리로서 족하다고 생각한다. "곰.크"에서 성교육을 함은 마치 음악회에서 미술에관한 토론을 하는것같은 느낌이 든다. 도암 선생님의 성교육 시리즈가 전혀 퇴폐적이거나 호기심을 일시적으로 충족 시키는 이야기가 아니며 아주 유용한 내용이라는 것은 잘안다. 하지만 "곰.크"에서는 어느 아이가 성에대한 질문이 있더라도 개인 상담을 하 거나 하이텔내의 다른곳에 있는 상담실로 안내 하면 족하다고 본다. 따라서 나는 "곰.크"에서의 성교육을 분명히 반대한다.
저는 선생님의 글이 성교육에 크게 도움이 될뿐만 아니라 퇴폐라든가 호기심 과는 관련이 없는 좋은 글임을 인정 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그 자리에 적절할까 하는 생각을 거듭하여 보았으나 하필 "곰.크"에서 할필요는 없다, "곰.크"에 적절한 내용이 아니다 하는 의견 입니다. 그렇지만 저의 이런 의견때문에 선생님께서 옳다고 생각하시는 뜻을꺽을 필 요는 없으십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누구나 자유롭게 글을 올릴수 있으며 한두 사람의 반대가 아니라 원로방의 뜻이 모아지면 삭제할수 있을 뿐입니다 다만, 이런 의견도 있으므로 참고 하시기를 바랄 분입니다.
노변이 있어서 이런 얘기들을 할수 있으니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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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정
.밝 누 리.
[밝은 우리의 온 삶터]
-밝은 밝음이며, 온은 따뜻함(溫)이고 모두(全 온통)이며, 누리는 살아가는 세상이고 살아가는 역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