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판(校販), 4분할 원칙, 시행착오를 저지르는 것 같은데...

  "4분할 원칙"
경험, 산경험, 지금은 내가 35년전 1970년대 후반에 겪은 경험이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의 지인이 지금 과거에 내가 겪은 일을 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보니 아무래도 시행착오를 저지르는 것 같지만
일러줄 수가 없어 안타깝다.
어차피 세상이란 돌고 도는 것인데...

교판(校販)이라는 말이 있다.
학교에 물건을 파는 것을 말한다. 주로 교보재(교육보조재료)를 팔지만 책이나 체육복 미술품 등 학생들에게 필요한 여러 물건을 파는 것이다. 그런데 교판은 기본이 있다. "4분할 원칙"으로 판매가 할당을 잘해야 한다. 재료값. 내 이익금. 판매처 이익금. 학교에 낼 희사금 등으로 4등분하여 값을 매겨야 한다.

                                             < 국민학교 산수 교보재 >

 학교에 물건을 팔려면 먼저 학교의 실세가 누구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교장, 교감, 교무과장, 서무과장 각 학교마다 실세가 있다. 국공립학교는 대부분 교장이나 교감이 실세이다. 그러나 사립학교는 서무나 교무 등 엉뚱한 사람이 실세인 경우가 더 많다.  학교의 학생들에게 물건을 팔려면 그 실세를 알고나서 그 실세로 부터 판매승락을 받아야 한다. 실세가 아닌 교장이나 교감 등에게 판매승락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실세가 알고 나가라고 하면 판매를 포기해야 한다.

1970년대에는 학생들에게 직접 판매가 가능했다.
쉬는시간 10분, 5분은 1반, 5분은 2반, 팔고자하는 물건을 가지고 교실에 들어가 선전을 해야 한다. 난 책을 가지고 이렇게 교실을 드나들었다. 학교의 승락을 받지 못한 상태에선 잡상인이니 아주 조심해야 한다.
  만약 학교의 승락을 받았을 경우 학교앞의 문구점이나 매점 등에서 팔 수도 있다. 그럴때는 매점(판매처)이익금을 판매가에 할당해야 하고, 판매처가 여러 곳일 경우 적정량으로 잘 분배하여야 한다.

 

1970년대 말
군대를 제대하고 오니 집이 이사가고 없었다.(*)  지금 처럼 전화가 흔한 세상이 아니어서지만 아무 연락도 없이 이사를 가버렸으니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척집을 찾아가 양계장을 시작한 집을 찾아 간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부모님이 이렇게 삶의 틀을 바꾸었으니 내 삶의 틀도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 '화(火)'를 참으라고요? http://il11.tistory.com/101  에 실린 노래의 노랫말..
  "군대생활 삼년만에 제대증명 갖고서 고향이라고 찾아갔더니 이사가고 없더라" 참고


양계장
그래서 나는 20대 중반의 어린나이에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면서 닭을 키웠는데 그러다 보니 대한양계협회 육계분과위원회 총무를 역임한 적도 있고, 산란계를 18,000여수를 키워 하루에 달걀 1만개 정도씩을 거두기도 하였다. 35년쯤 전의 일이니 그동안 물가가 많이 올랐는데 달걀값은 별로 오르지 않았다. 당시 달걀값은 100원 수준이었다. 경란, 중란, 대란, 특란, 왕란, 쌍란 이렇게 구분하였는데 평균 100원이면 하루 100만원을 생산한 것이다. 당시로서는 하루 100만원이란 돈이 참 큰 돈이었다. 며칠만 모으면 집 한 채가 되는 돈이었다.

              < 1970년대 말. 기르던 것과 같은 종류의 산란계와 같은 형태의 양계장 >

난 학교 복학도 미루고 양계장 규모 키우기에 나섰다. 어린 나이에 하루 100만원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은 당시로선 대단한 일이기도 했고, 제대를 학교 복학하기 어중간할 때 하여 다음학기 등록까지 시간이 남기도 하였고, 그래서 양계장에 뛰어들게 되었지만 그 때가 참 멋진 인생이기도 했다.

그런데 세상사 호사다마라고 하지 않는가?
뉴캐슬. 요즘은 닭병이라고 하면 AI를 말하고 얼마전에도 베트남에서 AI가 발생하여 닭 수만마리를 살처분하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1978년 당시엔 조류독감이나 AI는 없었고 뉴캐슬이라는 닭호흡기병이 있었는데 어느 양계장이나 그 병이 들었다 하면 닭이 몰살을 하였다. 나의 양계장도 마찬가지였다.

산란 18,000수. 육계 2만여수가 불과 1주일 사이에 모두 죽어 버렸다.
  혹시 살릴까 하여 OO가축약품에서 스위스제 자동연속주사기와 백신을 사다가 온 식구가 붙어서 주사를 놔 보았으나 헛일이었고, 이렇게 죽은 닭은 처음엔 한 마리 천 원, 점차 두 마리 천 원, 나중엔 다섯 마리 천 원, 그러나 결국 더 사가는 사람도 없는데다 죽은 닭은 파는 것이 불법행위라 육계(고깃닭) 2만여 수를 포함하여 4만여 수의 닭을 양계장의 땅을 파고 묻었다.

이 때부터 나의 젊은날의 역경은 시작 되었다.
얼마동안 하도 급해서 유흥업소나 숙박업소의 호객행위까지 했으니 얼마나 급했었는지 짐작이갈 것이다. 내가 빈손으로 집에 들면 그날은 온 식구가 굶어야 했다. 중학생 고등학생이었던 세 동생은 말할 것도 없고 양친 까지 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도둑질이라도 마다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어려운 역경을 겪으며 겨울을 지내다가 시작한 것이 책장사였다.

이 책장사를 하면서 "대물인간"이란 책을 만화가게에 대본용으로 팔아 히트쳤다는 이야기는 얼마전에 여기에 올린바 있는데 이렇게 가판(街販 가두, 길거리 판매)과 방판(訪販 방문판매)을하다가 기회가 있어 교판(校販)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책 '대물인간'을 가판과 방판으로 신나게 잘 팔고 있는데 어느날 이모님이 오셨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이모님이신데 어머니가 인사를 시키신다. 이 이모님이 오랫동안 교판(校販)을 하셨다면서 함께하여 보자고 하신다. 마침 책장사를 하였다니 책이 좋겠다하여 고른 책이 가정보감과 같은 가례의식 등이 들어 있는 색연필로 한자연습을 하고 지울 수 있도록 코팅이 되어있는 책이었다.

그 책을 출판사의 지사에서 2,400원에 받아다 4천원에 파는 것이었다.
처음에 간 학교가 OO교 이다. 이 학교는 지금은 있을 수 없는 학교였던 것 같다. 한 울타리 안에 중,여중,고,여고 등 4개 학교가 있고 각 학교에 교감은 있으나 교장은 이사장 한 분이 모두 겸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실세인 이사장이 우리학교 학생들이 이 책만 제대로 알고 졸업해도 훌륭하겠다면서 적극적으로 판매를 도왔으니 얼마나 많이 팔았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래서 그 책의 출판사지사에 가서 공급가 협상을 하여 1600원으로 하였다가 나중엔 출판사본사와 직거래하여 공급가를 1,200원으로 낮췄으니 권당 마진이 1,800원어서 재미가 쏠쏠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일반판매가가 4천원, 학교 판매가가 3천원, 그러니 일반 판매한 책이 반품이 들어온다고 더는 학교에서 싼값에 팔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출판사지사와 협상한 결과가 판매구역 밖의 벽지에 가서 파는 것이다. 결국 그 책이 내게 1200원에 오므로 판매가를 2,200원으로 내려서 출판사의 지사 판매구역 밖의 학교에 가서 팔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얼마전 진도 금골산 금골사 옆마을에서 책을 팔면서 굴을 따던 아이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거기에 도선을 타고 왕복하면서 책을 팔았던 이야기도 썼던가? 여하튼 굴 따던 아이에 대한 글은 그 때의 일을 쓴 것이다.

이 때 겪은 시행착오가 바로 서두에 말한 내용 들이다.
학교의 실세를 파악하지 않고 판매하다 쫒겨 나오고, 학생들에게 직접판매가 불가하다 하여 학교앞의 가게에 위탁판매하면서 판매처 끼리의 판매점 수익금 조정과 판매점별 판매량 조정 때문에 애로를 겪기도 하고, 결국 경험에 의해 4분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조원가. 내 이익금. 판매처 이익금. 학교 희사금으로 분할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교판은 더욱 확장 되었다.
한 번 어느학교에 판매를 하게 되면 길이 뚫려 미술품 수예품 체육복 등을 잇따라 팔 수가 있게 되는데 4분할 원칙을 지켜가며 양계장 망하면서 진 빚을 다 갚고 홀가분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입사시헙을 봐 취업을 한 후 복학을 하고 인생행로를 제대로 갈 수 있었다.

45년 전에 돌아가신 나의 큰아버지가 내게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남자란 무엇이고 지탄 받을 일이 아니고 패가망신할 만큼이 아니면 배워 두는 게 좋다."

위 말씀도 여기에 올린 적이 있는데, 남자는 모든 것을 다 배워 두어야 한다고 하셨고 난 이렇게 책장사로 인생을 반전시킬 수 있었다. 평생 다시 이런 일을 할 기회가 없었으나 이 책장사를 한 시기가 내게 의지와 절실함을 배양한 소중한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정해진 운명이 있다더냐?
모든 것이 네 하기에 달렸다.
좋은 인연을 지으며 살아가면 되는 것이지 어디 정해진 운명이 있다더냐?
마음 먹기에 달렸다.

경험해보니 극도의 어려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나의 운명을 내가 만들어 가니 패배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은 내가 젊어서 겪은 경험이 학교도 사회도 많이 달라져 이런 "4분할 원칙"이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의 지인이 내가 겪은 일을 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보니 아무래도 시행착오를 저지르는
것 같은데 일러줄 수도 없다.
어차피 세상이란 돌고 도는 것인데...

 






 

.밝 누 리.

[밝은 우리의 온 삶터]

-밝은 밝음이며, 온은 따뜻함(溫)이고 모두(全 온통)이며, 누리는 살아가는 세상이고 살아가는 역사 입니다-

Posted by koreanu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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