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시절.. 파노라마 같은 인생살이라고 하지 않는가...

 자서전이 따로 있는가?

무엇을 기억이라고 할까?
어떻게 기억을 지키고 가꾸어 갈 수 있을까?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글을 씀으로서 완전한 기억을 가질 수 있게 될까?
내가 함께 앉아서 이야기하여 주지 못하더라도 후일 나의 아이들이 나의 이 글을 읽으면서 고개를 주억거렸으
면 좋겠다.

그러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파노라마 같은 인생살이라고 하지 않는가?
기억의 조각들을 꿰어 맞추며 내일을 준비한다.

     < 훼~ 소란하게 소리지르며 칙칙푹푹~ 60년대 철길을 누비던 시커먼 증기기관차 >


  사람은 아주 어렸을 적 일을 몇 살 때 부터 기억할까?
나는 자주 이에대한 의문을 가진다. 그리고 나의 아주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린다. 난 세 살 적 기억을 가지고 있다. 또 네 살 때 기억도 가지고 있고, 다섯 살 때 기억도 있다.


먼저 세 살 때.

집이 철로 옆이었다. 철도 침목 10여개의 철교에서 놀다 기차와 와 나 때문에 인산인해가 되었다.

다음 네 살 때.

그 철도에서 이상한 차가 와서 깜짝놀라 옆집으로 뛰어 들어갔는데 왜 그러느냐고 날 놀렸다.

 또 어느날 눈에 뭐가 들어가 울면서 갔더니 이번엔 그 아주머니가 날 안고 혀로 눈을 씻어 주었다.

그 다음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이삿짐 실은 리어카를 끌고 어머니가 동생을 업고 난 종종걸음으로 따라서 이사를 간다.


위 외에도 기억나는 조각들이 있지만 위의 내용들은 아주 선명하게 나의 뇌리에 박혀 간혹 생각이 떠오른다.  난 이런 나의 기억들이 맞을까 싶어 어른들께 확인하였고, 기차가 선일, 이사갈 때 리어카를 따라간 일 등 나의 기억과 일치하는 말씀들을 하신다.

 

내가 지금 이런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서전 홈페이지도 있고, 내가 1992년 부터 "고령자 PC통신 그룹 원로방元老坊(*)"에서 활동하면서 게시판에 글을 쓴다는 것은 나중에 자손들이 조상의 글을 찾아 제삿날 같은 때도 함께 출력하여 붙여놓고 함께 읽으면서 모실 수 있을테니 자서전을 쓰는 것과 같으니 게시판에 글을 쓰고, 원로방에서 활동을 합시다라고 말하였었다.  지금이라고 하여 달라질 것은 없다. 게시판에 무의식간에 쓴 글들이 후일 자손들이 조상을 기리는 자료가 될 것임은 자명하다.

 

예를 든다.
지난해, 현 정권에서 장권이 되신 모 국회의원의 아버지 께서 원로방에서 활동하시면서 쓴 글 약 300여점을 알려 드렸다.당시 국회의원(현 박근혜 정권의 장관)인 그 분은 내게 전화를 걸어와 아버지가 남기신 글을 찾게 해 줘서 감사하다고 하였다.  바로 이 것이다. 게시판에 글을 쓴다는 것은 자서전을 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두서가 없으나 청년기의 글을 몇 차례 게시판에 올렸다.

지금 이 글은 아주 유아기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이 게 나중에 정작 내가 자서전을 편질하는 기회가 온다면 자서전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서전을 쓸 기회가 없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는 나의 글을 읽고 내가 살아간 길을 살필 것이니 이렇게 쓴 글이 자서전이나 다르지 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 한다. 그리고 앞으로 글을 쓰다보면 유년기 소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그리고 최근의 일 들 까지 점차 양이 늘어날 것이고...

 

내가 태어난 곳 부터 이야기 한다.
나는 지금은 광역시가 되었으나 당시로선 소도시인 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어머니는 나이차이가 15살이나 나신다. 아버지가 30대 중반에 날 낳았을 때 영감이 애를 낳았다고 사람들이 구경을 왔었다고 한다.  그러니 어머니와 나의 나이 차이는 20살 밖에 나지 않는다. 전에는 몰랐으나 생각하여 보면 내가 고3일때 어머니는 겨우 39세 이셨다. 아버지는 이에 15살을 더한 54세 이셨으니 어머니가 많이 젊으셨던 것이지만 내가 소년기를 지낼 때 지금 기준이라면 아버지도 그렇게 많이 늙으신 것은 아니신 것이다.

 

                                 < 삶의 애환이 서려 보이는 판자집 >


내가 태어난 판자집. 아버지 어머니가 결혼하시고 신접살림을 고모집 작은방에서 시작하여 두부를 집에서 만들어 아버지가 팔러 다녀 모은 돈으로 지은 집이라고 한다. 인공난(6.25) 직후이니 내가 태어나던 당시로선 소도시에도 판자집이 제법 있었던가 보다. 그래서 였던가? 나는 그래도 판자집이지만 남의 집 살이가 아닌  내집에서 태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판자집이 팔렸다.
극장을 지으려고 하는 사람이 거기 있는 여러 판자집을 사들인 것인다. 그리하여 그 자리엔 OO극장이 생겼다. 얼마전 여기에 다뉴브강의 잔물결과 사의 찬미를 연결한 "사의 찬미(死의 讃美)와 다뉴브 강의 잔물결"이란 글을 올렸는데 그 글 가운데 나오는 극장이 바로 이 극장이다.

나중에 원로방 활동을 하면서 어느 앞선이 께서 그 극장주의 따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것도 인연 아니겠는가? 난 사실 퍽 반가웠다. 그분은 지금도 원로방에서 앞선이로서 활동을 하고 계신다.


그 집에서 이사간 집이 바로 위에 말한 철도옆 집이다.
거기에 개울이 흘렀고 그 개울위로 10여개의 침목을 걸친 철교가 있었는데 난 세 살 무렵에 그 철교의 이 쪽에서 저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서 거너기를 좋아 하였다. 당시엔 철로 통행을 금지하지 않았고 기차의 통행량이 많지 않아서 세 살 짜리 어린 아기가 철교 위에서 놀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그 철교위에 있는데 시커먼 기차가 달려 왔다. 지금 내 기억에 난 황급하게 그 철교를 벗어 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기차는 섰고, 석탄을 때는 시커먼 그 기차의 기관차에서 기관사가 내려와 나를 안아 들었다. 내가 당황하고 무섭고 놀라서 우는 것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수없는 사람들이 몰려 들고, 혼란하고 시끄럽고, 어쩔 줄 몰랐던 기억이 수십년이 지난 지금 내게 선명히 남아 있는 것이다.

 

                                    < 현대화한 철도 수리차량. 일명 광보차? >


바로 위에 말한 철길에서 두 번째 말한 이상한 열차도 보았었다. 나중에 생각하여 보면 그 열차는 광보차라 하여 사이렌을 울리면서 사람이 앞뒤에서 펌프질하듯 지렛대를 눌러 운행하는 철도 수리용 조그만 차였던 것 같다. 그런데 난 평소에 보지 않던 그 이상한 열차를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거기에 살면서 세 발 자전거를 탓다고 한다.
내 왼쪽 눈 가장자리에 흉터가 있다. 바로 철교가 있는 그 개울에 자건거를 탄채 빠져-떨어져- 생긴 상처라고 하는데 왜인지 내겐 그 일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세 번째 리어카 따라서 이사가던 기억도 그 철길가 연결되어 있다.

철길 따라 가는데 위로 다리가 놓이고 밑으로 기차가 가는 길이 있었다. 그 길가를 아버지는 이삿짐을 잔득 실은 리어카를 끌고 가시고, 어머니는 동생을 업고 따라 가면서 리어카를 밀고, 난 종종 걸음으로 그 리어카를 따라 갔다. 그런데 그 다리 근처에 이르렀을 때 새카만 기관차가 훼~ 소리를 지르면 달려 왔고 평소와 달리 내 몸 보다 위가 아닌 아래로 지나가는 열차를 보면서 놀라고 무서우면서도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상황이 떠오른다.

 

 

이런 것을 기억이라고 하겠지만 기억력이라고 까지 할 것이야 없겠지.
하지만 난 이렇게 글을 씀으로서 그 기억들을 완전히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함께 앉아서 이야기하여 주지
못하더라도 후일 나의 아이들이 나의 이 글을 읽으면서 고개를 주억거릴 일이 있을까?


그러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파노라마 같은 인생살이라고 하지 않는가?
기억의 조각들을 꿰어 맞추며 내일을 준비한다.


 

 

 



 



.밝 누 리.

[밝은 우리의 온 삶터]

-밝은 밝음이며, 온은 따뜻함(溫)이고 모두(全 온통)이며, 누리는 살아가는 세상이고 살아가는 역사 입니다-

Posted by koreanu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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