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 합격을 하고도...

 

  나는 수석합격을 하여 보았다.
취직시험, 입사시험이라고도 하던가? 신입사원을 모집하는 시험에 응시하여 수석합격을 한 것이다.

1970년대 후반에 군대를 제대하고, 부모님이 양계장을 시작하신것을 복학까지 하겠다고 시작한 것이 욕심내어 규모를 키우다가 뉴캐슬이란 닭병으로 2만여수를 모두 땅에 묻고 생계를 위해 책장사를 시작하였다가 교판, 즉, 학교에 들어가 한창 책을 팔던 때의 일이다.

 

                < 수석합격을 하고도.. 숨은듯 떠오르는 관매도의 해돋이처럼... >

 

어느날 행원모집광고였던가 뭐였던가? 여하튼 은행원을 모집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원서를 내고 입사시험을 본 것이다. 그러고는 바로 잊어 버렸다. 당시 나는 진도에서 열심히 책을 팔고 있었다. 진도OO고등학교. 진도여자OO고등학교. 군내 중학교. 의신 중학교. 오일시 중학교. 이렇게 판로가 넓혀진 것은 나를 좋게본 함평OOO중,고,여중,여고 등 4개 학교의 재단이사장 겸 교장선생님이 명함에 인삿말을 몇 자 적어 주신 것이 큰 힘이 되었다.

먼저 진도OO고등학교를 갔고, 그 명함을 제시하자 학교에서 책과 교보재 파는 것을 적극협조하여 주시고 다른 학교들도 소개하여 주셔서 수월하게 진행 되었다. 지난해 여기에 올린 글 "굴.."(2012.12.11 올린 글 참고)은 이 때 겪은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 과정에 언제 은행입사시험을 치렀던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시험을 치고는 잊고 다시 학교에서 책과 교보재 파는 일에 열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버님이 자꾸 은행에 가 보라고 하신다. 은행에서 사람이 왔는데 수석합격을 했다고 한다는 것이다.  집에 전화가 없으니 찾아 온 것 같은데 난 은행에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때가 그런 때였던가? 초봉이 7만원이라는데, 그런 봉급은 나에게 전혀 매력이 없었다.  학교에서 책을 몇달간 파는 동안 빚 1,850 만원을 다 갚고 약간의 여유자금이 쌓이기 시작하는 때인데 월 7만원 봉급쟁이란 전혀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몇 차례 집에 다녀오면서 아버님이 은행에 한 번 가 보라는 권유를 계속 뿌리쳤다.


우리나라의 섬들은 많기도 하지만 숨어있는 보석 같은 곳이 많다.
진도의 남쪽에는 조도라는 섬이 있고 또 그 남쪽에는 관매도라는 섬이 있다. 이 관매도는 가히 환상의 섬이라고 생각한다. 왜냐? 내가 두 번을 가려다 못 갔으니까.. 

 

                   < 관매도. 상조도, 하조도의 남쪽.. 오른쪽 사자도의 위쪽이 진도항 >

 

한 번은 조도중학교에서 책을 팔 때의 일이다.
관매도를 한 번 가야지 하면서 책 팔기에 여념이 없어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었다.

또 한 번은 애인과 여행을 할 때이다. 저기 선착장에서 배타고 건너면 관매도라는 곳까지 차를 몰고 가서 텐트를 쳤는데, 이 때가 아마 1992년이나 1993년 쯤일 것이다. 당시는 오토캠핑이란 말은 없었던듯 싶다. 그리고 돈 받고 텐트 치도록 하는 캠핑장도 없었고.. 여하튼 차에 텐트를 싣고 적당한 곳에 텐트를 치면 되었는데 그 해 여름에 관매도에 가겠다고 조도의 선창이 가까운 곳에 텐트를 치고 아름다운 석양을 사진으로 찍었고 그 사진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올리면 좋겠는데 사진을 찾고, 스캔하고, 하기가 복잡하다.그런데 아뿔사, 다음날 태풍주의보가 내린 것이다. 그러니 관매도에 가는 것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난 여름이면 매년 섬 하나씩을 다니는 여행을 수년간 하면서 선유구도나 욕지도 까지도 들어갔는데 아직 관매도에는 못 가고 있다. 아이가 이제 여섯 살 이니 아직 관매도에 갈 나이는 안 되었고, 그러나 언젠가 애가 섬에 갈만하면 함께 가 봐야 하겠다.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흘렀는데 이렇게 돈 잘 벌면서 아름다운 경치와 사람들 속에 있는데 쥐꼬리만한 봉급을 주는 행원이 되고 싶었겠는가? 전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물어 물어 아버님이 진도에 까지 쫒아 오셨다.

은행에서 세 차례나 데리러 왔다면서 책장사보다는 은행원이 훨씬 나으니 젊은 놈이 그러고 있지 말고 은행에 취직하라는 것이다.

  허~ 지금 젊은이라면 아마 거절하고 제 갈길을 갔을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말末 아버님의 말씀은 법이었다. 다른 사람은 어쩔지 모르지만 나만큼은 그랬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모든 것을 정리하여 초보 행원이 될 수 밖에 없었다.턱도 아닌 조건을 달아서 은행에 들어가면서 예나 이제나 내가 가진 특질을 발휘하였다.

 

앗!
잠간!
지금 전화를 받았는데, 이런 우연이 있을까? 수십년전 1970년대말 1980년대 초에 함께 일하던 동료직원 최OO에게서 지
금(2013.04.29 17:46) 전화가 왔다. 지지난주에 고향에 가서 어떤 새마을 금고에 들렸는데 우연히 아는 얼굴을 만나 명함을 주면서 그때 함께 일하던 사람들의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했더니 전달이 되어 전화가 온 것이다. 그 때 함께 일하던 남여행원 몇 명이 오늘 저녁에 만나는데 내가 전한 명함을 전달 받았다는 것이다. 함께 있는 기OO과도 통화하고 서로 연락처 알았으니 내왕하면서 지내자고 약속하였다.

 

이야기가 이어진다.
나는 입사하면서 첫째, 최고가 되겠다. 둘째, 1년 이내에 승진하지 못하면 그만둔다. 이런 결심을 한 것이다. 내가 가진 특질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인데 이 때의 이야기는 나중에 거론할 기회를 만들어야 하겠다.

 

수석합격을 하고도 근무하지 않겠다고 버티던 그날이 그립다.
이 이야기를 하다보니 한 가지가 더 생각 난다. 1967학년도에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는데 수석합격은 아니지만 명문인 OO중학교에 갑류 장학생으로 합격하였다. 중학교 입학시험 성적이 1~10등은 갑류 장학생이고, 11~20등은 을류 장학생이었으니 내가 10등 이내의 성적으로 중학교에 입학한 것은 분명하다. (이 나의 모교는 나중에 중학교 평준화 때 일류학교라하여 없어져서 난 중학교 후배도 모교도 없다.)

중학시절의 이야기도 이야기가 왔다갔다 하겠지만 언젠가는 이렇게 글로 쓸 생각이다.

 

이야기가 너무 장황하게 되었다.
난 이때 취직하여 은행에서 일하하면서 광주사태를 겪었다.  그 이야기도 다음에 하고, 또 책장사의 제 3탄 이랄 이 글에 실린 진도와 조도 등에서의 책을 팔던일도 언젠가는 한 번 쓰고 갈 생각이다.


장황하고 재미 없을 수 있는데, 이런 글을 쓰고 있다.
살아온 역사라고 강변하면서...


 


 

 


 



.밝 누 리.

[밝은 우리의 온 삶터]

-밝은 밝음이며, 온은 따뜻함(溫)이고 모두(全 온통)이며, 누리는 살아가는 세상이고 살아가는 역사 입니다-

Posted by koreanu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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