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약한 고려시대

이 시대의 공신이라고 해도 품격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개국 1등 공신 네 사람도 왕건으로 부터 사성을 받았을 만큼 뿌리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경주최씨 경주김씨 금성나씨 등의성씨들은삼국시대 부터 뿌리 내린 삼한척족이었으니 잔약한 고려의 공신에 비할바가 아닙니다.

우리일족이 이런 사실을 간과하고 고려에 뿌리를 두려는 것은 역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일로 생각되며 이번 설단에 고려시대 이저에 이미 찬란한 역사를 지닌 척족인 점을 확실히 표현하는 것이 우리시대 우리가 가진 소명이라고 생각 합니다.

아래에 고려의 잔약함으로 인하여 우리민족의고토를 회복하지 못한 내용을 살펴 봅니다.

我 朝鮮 一千年來 第一大事件 <= 제가학창시절에 읽은 제목은 위와 같았습니다.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사건) <= 요즘 이런 표현으로 책이 쓰여있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란"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고려시대.

고구려를 이었으니 고토회복이라는 숙제를 안고 고려가 열렸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세 번에 걸쳐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할 기회가 있었는데 잔약하여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첫번째 - 발해 멸망기

두번째 - 묘청의 란

세번째 - 위화도 회군

잔약한 고려가 기회를 놓쳐 고토를 회복하지 못하였는데 단재는 "묘청의 란"을 고토회복을 할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라 하여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사건"이라고 하였으나 사실은 왕건이 더욱 좋은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첫번째 - 발해 멸망기(907~926)

이 때는 왕건이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907년에 당나라가 멸망하였고, 918년에 고려가 건국 되었으며, 그로부터 8년 후 926년에 발해가 거란족의 야율아보기에 의해 멸망하였습니다.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 부터 고려가 건국된 918년 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918년 부터 926년 사이에 왕건이 북진하여 발해를 취하지 못한 것이 처음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요사에 의하면 야율아보기가 발해 상경부로 쳐들어간지 6일만에 항복을 받아 내었다고 합니다.

해동성국이라고 불리던 발해가 왜 그렇게 쉽사리 무너졌는지는 수수께끼 입니다.

어떤 학자는 발해의 백성들이 북으로 이동한 후 바다건너 남북아메리카로 이주하여 빈땅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백두산 화산이 대 폭발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927년에 백제의 견훤은 신라 경애왕을 포석정에서 자살하게 하고 김부(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룰 권지국사에 임명하여 2국체제를 이루었습니다.

그렇다면 북에서는 야율아보기가 남에서는 견훤이 각 영토를 넓힐 때 왕건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당나라가 망하고 발해마저 백성이 줄어들거나 백두산이 폭발하여 야율아보기에게 힘없이 망하는 발해를 취하지 못한 왕건에 대한 아쉬움은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궁예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궁예는 그저 미치광이 폭군일 뿐이었나

KBS1 '역사스페셜' 선각대사비에서 발견한 고려 건국 비화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111/h2011112321513386330.htm

2011.11.24 KBS1 역사스페셜에서도 다루었지만 궁예가 과연 관심법과 현신미륵이라고 하면서 폭행을 일삼았을까요? 럭키보이 왕건이 아니었다면 우리 역사가 더욱 찬란하여졌을 수도 있습니다. 궁예는 서경으로 천도하고 북진하여 칭제건원하여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포부를 지닌 인물이었음이 분명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단재는 잔약한 고려라는 말을 그의 저서(조선사 연구)에 남겼습니다.
고려의 역사를 보면 인주이씨(이자겸 등)가 70년 동안, 경주김씨(김부식 등)가 60년 동안, 무신정권이 100년 동안(최충헌 등), 그리고 충렬왕(재위 1274~1308) 부터 공민왕때까지 내리 7대 1세기 동안를 몽고(원)의 부마국으로 지냈으니 고려를 잔약하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견훤이 927년 신라 경애왕을 포석정까지 쳐들어가 자결케하여 고려와 백제 2국 체제가 되었으니, 만약 궁예나 견훤이 후삼국을 통일하였더라면 우리 역사가 오늘날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인데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두번째 - 묘청의 란

신라귀족의 후예인 김부식이 득세하여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당시 송나라는 약체였고 신흥금나라는 제대로 국격을 갖추지도 못한채 결국 몽골에게 망합니다.

충분히 북진하여 고토를 회복할 수 있었는데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낭가와 불교 양가 대 유교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사의 싸움이니, 묘청은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묘청의 천도 운동에서 묘청이 패하고 김부식이 이겼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인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다. 만약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라 평가 했으며 현재 국사교과서에도 실려 있습니다.

세번째 - 위화도 회군

고려는 고토를 회복할 수 있는세 번째의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배달벌(*)은 무주공산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주원장은 힘이 없어서 이성계에게 배달벌로 진출하지 말라고 협박하였고, 북원이 점점쇄약하여 지는 고려말이 요동과 배달벌을 회복할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잔약한 고려는 기회를 놓쳐 망국에 이르렀으며, 결국 후일 여진족이 후금(청)을 세워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 것입니다.

* 배달벌(만주. 동북아벌판)

고려시대

해양세력이 사라져버린 시대입니다.

작제건-왕륭-왕건으로 이어지던 예성강 벽란도의 해양세력이었던 왕건은 해양세력의 영향력을 아주 잘 알았습니다.

서남해안의 금성을 위주로 한 나총례공의 해양세력과 손을 잡았기에 고려를 건국할 수 있었으나,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로운 해양세력을 억누르지 않고서는 나라의 기틀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기에 해양세력을 억눌렀고 이로 인해 금성을 위주로한 해양세력이었던 나총례 공의 공훈이 지워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이후 나유 대장군이 삼별초를 토벌하면서 진도와 제주도 바다에 출병하고, 여몽연합군의 고려측 장수가 되어 왜의 바다에 출병한 것을 볼 때 나씨 일문의 해양세력으로서의 위세가 그대로 꺽이지는 않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사학자인 동국대학교윤명철 교수는 역사를 비판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고 하면서 외국이라면 함부로 만약을 말할 수 없으나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만약을 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만약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궁예가 관심법이니 현신미륵이니 하지 않았다면..

궁예의 관심대로 서경으로 진출하고 북진하여 발해를 취하였더라면..

우리나라의 강역이 지금 요동지방을 지나 북경지역까지 뻗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궁예가 패륜한 폭군으로 그려졌다는 KBS1 '역사스페셜'의 기사내용을아래에 붙였습니다.

Posted by koreanu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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